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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천주교 대정성지 정난주 마리아 묘 본문

일상스토리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천주교 대정성지 정난주 마리아 묘

세상관람 2024. 4. 15.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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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는 이곳저곳 찾아보면, 생각지 못했던 명소들이 있다. 관광지라고 하긴 뭣하지만, attraction 말 그대로 매력적인 장소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이번에 가본 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그 이름은 바로

"천주교 대정성지 정난주 마리아 묘"

 

사실,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네이버 지도 앱을 쳐다보며 어디갈까 고민하던 차에 대정성지라고 표시된 곳이 있어서 얼떨결에 가보게 되었다. 함께 여행하던 분은 정난주 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하며, 찾아보더니 "아"하는 것이 아닌가! 황사영 백서로 잘 알고 있었고, 한국사에서 보면, 신유박해와 관련된 인물 중 하나로 얘기해주어서 겨우 알게 되었다.

 

1801년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그 이전에는 1791년에 신해박해가 있은지 10년 만에 다시 일어났던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정약용, 정약전 말이다.

 

정난주는 정약용과 정약전의 조카인 셈이다. 가족관계가 다소 복잡하긴 하지만, 정난주의 할아버지인 정재원에게는 3명의 처가 있었고,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난 정난주의 아버지 정약현이 장남이고, 그 두 번째 처 윤씨라는 분의 아들이 바로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이다. 그리고 두번째 부인에게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이 결혼한 남자가 바로 조선시대 천주교를 처음으로 믿은 이승훈이란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정난주는 고모부인 이승훈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난주의 남편 황사영은 바로 이승훈을 통해 천주교를 아주 독실히 믿게 되었는데, 조선의 천주교 박해 상황과 신앙의 자유를 알리고자 청나라 주교에게 보내려던 청원서였다고 한다. 이것이 발각되어 정난주의 고모부이자 천주교의 첫 번째 영세자인 이승훈은 참수되었고, 그녀의 남편인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그 가족들은 연좌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정난주는 제주도로 유배되어 관노로 살다가 66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난주의 실제 이름은 정명련이라고 한다. 나주 정씨 족보, 승정원일기와 같은 기록물에서는 정명련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권이선(2024)의 기록과 기억을 통해 본 정명련(정난주)의 삶에 대한 검토 라는 논문을 보면, 1976년 김구정의 '한국 순교 사화 1권'에서 처음으로 정난주란 이름이 기록되었고, 이후 1977년 김병준 신부가 김구정의 부탁으로 구전되는 내용을 정리한 '황사영 처자의 길' 이란 글에서 정난주의 세례명이 마리아 라고 씌였다고 한다.

 

정난주는 관노로 1801년부터 1838년까지 살았지만,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묘가 관리되고 알려진 것은 참으로 놀랍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살았던 삶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지 않을까 한다. 이 이야기를 계속 파 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도 있고, 안타까운 점도 있다. 정치적인 자유가 아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중 하나인 신앙의 자유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슬픈 이야기와 달리, 정난주 마리아의 묘는 참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들어가는 길은 1차선 비포장길이긴 하지만, 그리 길지 않았다. 비포장길의 갈랫길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바로 아래 사진처럼 왼쪽의 넓은 주차장이 환영하고 있고, 걸어 들어가는 방향으로 높은 야자수가 양쪽으로 뻗어 있다.

 

그 야자수 끝에는 출입구와 함께 왼쪽에는 정난주의 모습을 본 뜬 것같은 동상이 있다. 정난주가 품에 안고 있는 아기는 유배가던 당시 아들 경한을 마지막으로 품에 안았지만, 이 동상에서만이라도 계속 품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아니었을까 한다. 유배지로 보내질 당시에 정난주는 제주도로, 아들 황경한은 1800년 생인데 이듬해인 1801년에 어머니와 분리되어 추자도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동상의 의미는 더욱 새롭다.

정난주 마리아 묘, 천주교 대정성지 입구

 

우리가 갔던 그날에는 천주교에서 순례를 오신 분들이 찬송하며, 기도하고 계셨다. 그 분들의 기도 소리와 찬송소리가 왜 그리 구슬펐는지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안타깝게도 나는 다녀와서 이 내용을 조사하게 되어 사진으로나마 잠시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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